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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서전 '산도 생명이다' 플래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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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전날 내린 장맛비는 행사 당일(7월 17일) 아침까지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계룡산 자락에 낮게 깔린 오전 10시경. 금방 주저앉아 영원히 굴러가지 않을 것만 같은 찌그러진 자동차 한 대가 일주문 곁으로 멈춰선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이 바로 한국민족서예인협회 대전·충남 서예인들이다.
그들의 평균 연령은 40대. 하지만 청년의 열정이 그들의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일주문 곁에 낡은 자동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연다. 그 안에는 플래카드, 나무 사이를 연결할 밧줄 뭉치, 먹물 냄새 가득 밴 서예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몇 날 며칠 산고 끝에 완성된 그들의 작품이 드디어 세상에 첫선을 내보이는 가슴 떨리는 순간! 살풋,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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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를 준비하는 서예인들과 청년 작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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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날씨가 불안해도, 어쨌든 시작해 봅시다."
누군가 날씨에 대한 사람들의 근심을 깨운다. 갑자기 손이 바쁘다. 일주문 곁에 '산도 생명이다'는 슬로건이 적힌 플래카드가 매달리고 본격적인 행사 준비가 시작됐다. 하나 둘씩 민족문학작가회의 대전충남지회 소속의 작가들이 찾아와 부지런히 일손을 거든다. 어느덧 바쁜 사람들의 몸놀림에 반가운 태양이 쑥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쨍한 하늘이다. 안도와 기쁨이 사람들의 힘을 돋운다.
울긋불긋 단풍잎 빛깔의 천 위에는 연서 같은 시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로 조용히 내려 앉아 있었다. 어느 밤 홀로 깨어 몇 번이고 찬물로 머리를 감아내듯 적당한 시어들을 찾아내려 애태웠을 시인들의 두근거림이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다. 시와 붓글씨가 만나는 것은 단지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며, 정서와 정서가 만나 서로를 교감하는 일이다. '나'와 '너'가 '우리'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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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전시한 한국 야생화 사진(계룡산 국립공원 관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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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사람과 사람이 정서를 나누어 '우리'를 예감하듯 나무와 나무 사이를 동앗줄로 묶었다. 그 동앗줄 위에는 단풍잎을 닮은 시서들이 빨래처럼 널린다. 바람이 불면 적당히 하늘거리도록 너무 꽁꽁 묶을 필요가 없다는 어느 서예가의 말처럼 사람들의 표정도 가볍게 하늘거린다. 먹물 냄새인지 나무 냄새인지 바람에 풍겨오는 이 갸륵한 냄새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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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긋불긋 숲속에 전시된 시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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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그 사이 계룡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들이 타고 온 트럭에는 미대생들이 즐겨 쓰는 이젤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계룡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의 소장품(?)인 야생화 사진들이 함께 전시될 것이라 한다. 시와 서예, 그리고 야생화. 이건 정말 환상적이다. 그래도 아쉽다면 음악이 빠졌다는 것!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등산객들은 '이게 무슨 일이지?'하는 표정으로 미처 마무리 되지 않은 숲속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기웃기웃 멀뚱한 표정으로 스윽 훑어 보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작품을 마주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산에 와도 주변 한 번 둘러볼 여유조차 갖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기 발끝 쳐다보기도 바쁜지 무심하게 작품들을 지나치는 사람들. 산에 오면 산만 보지 말고, 나무와 꽃, 바람과 물소리, 무심코 지나치는 발길의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눈빛을 나눠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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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창웅 서예가의 서예 퍼포먼스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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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전시회 준비는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 마무리됐다. 준비를 마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방울 같은 뿌듯함이 송글송글 맺혔다. 드디어 이번 행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서예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먼저 임창웅 서예가가 다섯 살 아이의 키만한 대형 붓을 꺼내들었다. 등산로 바닥에 천을 깔고 그 위에 대형붓으로 '산도 생명이다'는 슬로건을 쓰는 것.
붓의 크기를 따라 사람들의 눈도 커진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가장 눈이 커지는 건 당연히 꼬마 신사 숙녀들. 가던 길을 멈추고 반짝반짝 검은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 보인다. 올망졸망 아이들의 눈빛만큼 맑은 생명의 기운이 이 계룡산 자락에 언제까지나 영원하기를 한 획 한 획 붓글씨가 나아갈 때마다 마음이 찡했다.
"자아∼이제는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쓰고 싶은 분들 마음껏 쓰세요! 여기 어린 꼬마 친구들도 쓸까요? 아무 거나 다 좋습니다. 산이름도 좋고, 나무 이름도 좋고, 다람쥐, 토끼, 산에서 본 것들…… 모두모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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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 퍼포먼스를 함께하는 서예인들과 일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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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머뭇머뭇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나와 붓을 잡는다. 이내 붓은 동이 났다. 무엇보다 꼬마 아이들의 솜씨가 눈길을 끌었다. 삐뚤빼뚤 왜 이렇게 붓이 말을 듣지 않는 걸까? 모두들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아무도 붓을 탓하는 사람이 없다. 제 맘대로 붓이 가기에 더 재미난 듯 까르르 까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어느덧 바닥에 놓인 천에는 알아보기 힘든 선문답들이 즐비하다. 어느 어른 못지 않게 진지한 표정의 꼬마 아가씨는 정성껏 '산이 좋다'를 쓴다. 아이의 마음이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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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을 들고 신이 난 꼬마 친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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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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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꼬마 아가씨의 작품 '산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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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전시장 앞에 놓인 탁자에서는 붓과 방명록이 준비됐다. 손수 산에 오르며 느낀 감상을 적은 등산객들은 이번 행사에 쓰인 글과 서예가 담긴 도록을 선물로 받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록에 관심을 보였다. 하도 오래 되어 손끝의 감각을 잃어 버린 서툰 솜씨로 정성껏 붓글씨를 옮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잠시나마 잊었던 우리의 전통 문화를 향유하는 순간이다. 서툴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법. 손 끝에 작은 미동도 그대로 놓치지 않는 붓이 때론 얄밉기도 하련만!
자상한 인상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 여산(與山) 이성배 서예가는 자신이 쓴 한시를 친절하게 해설해주셨다. 무엇보다 붓글씨를 쓸 때의 마음가짐이라든지, 서예가 본인의 붓글씨가 갖고 있는 특색에 대해 꼼꼼히 설명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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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하게 작품을 해설을 해주신 여산 이성배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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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요즘 사람들은 서예에 대해 너무 몰라요. 그만큼 더 멀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라도 해야 한 사람이라도 더 서예를 감상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선생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 온다. 이어 선생님을 비롯한 서예가 선생님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글을 직접 써 주는 시간을 마련하셨다. 자신이 원하는 글을 즉석에서 받게 된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의 얼굴이 날씨보다 더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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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객들에게 직접 붓글씨를 써 주고 있는 임창웅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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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은정 |
| 어느덧 5시가 되고 하늘에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하는 먹구름이 전시 마칠 시간을 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게 고마워했다. 아침까지 내리던 눈물을 꾹 참고 밝고 화창한 전시회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손이 바쁘다. 시작할 때보다 손발이 잘 맞는다. 어울린다는 것, 그리고 함께 정서를 나눈다는 것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도 드물다. 시인과 서예가들은 계룡산의 품에 안겨 정을 쌓았다. 일주문에 서서 기념 촬영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한층 더 아름답고 너그러워 보인다.
"다음 전시회까지 안녕히들 계시오!"
산을 내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계룡산이 굽어본다. 내일이 있기에 헤어짐도 경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