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족서예인협회 창립 선언문
도도한 민족 문화의 중심에서 아름다운 예술의 꽃을 활짝 피어왔던 민족서예 2천년의 역사는 지금 새로운 요청에 직면해 있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밀려들어온 서양 문화는 우리 문화에 거대한 충격을 가하면서 문명사적 전환을 일으켰지만, 민족 내부의 오래된 전통 속에 살아있던 예술의 혼은 새로운 생명력으로 살아나고 있다.
아직도 혼란의 역사 속에 놓여 있지만 민족의 역량은 성숙되어가고 있다. 21세기의 지평에 서 있는 지금 우리의 민족 서예는 근대 서예 100년의 양적 팽창과 질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좌표를 찍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민족 문화의 암흑기였던 일제 침략기를 벗어난 이후 민족 서예는 법고창신의 예술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창조적인 예술 세계를 전개해왔다. 해방 이후 50년의 서예 역사는 서예가 민족문화의 중요 자산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민족예술의 오랜 전통을 복원해내고 한글서예의 새로운 전개로 서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 속의 예술로 스며들었고 수많은 전문 창작자들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예계는 반세기 동안의 성과를 흡족해하기도 전에 최근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수백만에 이르는 서예 동호인들의 양적 팽창이 민족 서예와 민족 문화의 발전으로 활짝 피어나기도 전에 침체의 길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한국민족서예인협회의 창립은 2천년 민족서예의 성과를 이어받고 새로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고자하는 서예인들의 의지의 결집이자, 산발적인 문제의식들을 조직화하고 올바른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차세대 민족 서예의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민족서예의 미래를 위한 이념적 방향과 실천적 과제를 함께 껴안고 있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전개하고자한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21세기적 민족서예학을 개발하고 확산해야한다. 이를 위해 한반도 남쪽의 서예인은 물론 북쪽과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에 산재해 있는 서예활동을 포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범민족적인 서예인 조직화와 활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요구 속에는 민족분단이 서예술은 물론이요 민족 문화 전반에 심각한 저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지향의 예술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동안 한국 서예 발전과 서단 형성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은 공모전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해야 한다. 이는 몇몇 사람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며 또한 당대에 쉽게 이룩되는 것도 아니다. 기성 서단이 내부의 개혁의 통해서 해야 할 것도 있고, 아울러 내일의 서단을 이끌어갈 젊은 세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환기시켜야 한다. 올바른 서예 교육의 정책적 반영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노력이 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 서예가 자기 세계에 갇혀있었다는 비판을 뼈아프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한국 현대사가 일제침략과 민족상잔의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긴 여정에 민중들이 참여하고 피 흘리고 있을 때 서예인들이 너무 방관자적 자세를 갖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해온 선배 서예인들의 자세와 비교해볼 때 몹시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시대의 아픔에 더욱 민감하게 상처받는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 또한 새롭게 환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아울러 강조해두고자 한다. 시대와 함께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참여와 실천의 활발한 활동은 시민운동과의 긴밀한 연대 속에 더울 힘을 얻을 것이며 소외 계층에 대한 지속적인 서예 교육활동은 서예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시각을 새롭게 할 것이다.
서예는 지금 광범위한 대중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 확산에 버금가는 활동이 미약한 편이다. 붓글씨가 대중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서예 대중화를 기반으로 대학 서예과가 설립되어 학문적 바탕을 굳건히 해나가고 있지만 전문 서예인들의 활동기반은 몹시 취약한 편이며 전문적인 학업을 마친 서예인들이 서예의 길에서 이탈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중적 확산에 걸맞는 제도적 장치의 부족은 서예계의 새로운 과제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서예인들이 공모전이라는 제한된 틀에서 더 이상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 속의 서예로서 서예인들이 보다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의 서예술 성취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체계 있는 틀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
봉사는 이 사회를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민서협은 이 기본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해 서예를 통한 사회공헌을 가장 앞에 두고 힘써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이상의 내용으로 한국민족서예인협회의 창립 취지를 밝히며 민족서예의 새로운 길을 찾는데 힘쓸 것이다. 우리의 선언에 뜻을 같이 하는 서예인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활동을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