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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학자 유회당 권이진

노석 임창웅 2009. 6. 29. 12:24
[대전문화유산답사기②] 으뜸 효행, 실학자 유회당 권이진

  보문산 서쪽, 산성동을 지나 대전동물원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작은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으로는 뿌리공원이 살짝 모습을 감추고 있고, 유등천을 거슬러 길이 이어진다. 짧은 내리막길이 아쉬울 때 왼쪽으로 난 작은 길 입구에 ‘무수동 유회당, 여경암, 구완동청자가마터’ 안내판이 장승처럼 서 있다. 적당히 구부러진 길을 따라 마을 끝 버스정류장에 다다를 즈음 왼편 언덕에 제법 큰 기와지붕이 나타난다.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17호인 유회당(有懷堂)이다.

  당대 최고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직분과 남다른 처세를 보여준 선비이자 40여 년간 어버이 묘소를 지키고자 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효심(孝心)을 담았던 유회당 권이진 선생의 향기가 배어나는 곳이다.

  

어버이 묘소를 끝없이 모시고 싶어

여경암 재사(齋寺)를 천금 들여 다시 지었네.

스님들 효험 있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나무꾼 아이들이 날마다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세.

 

네모난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따로 집 하나를 지어 글을 읽게 하였네.

어버이 받들고 후진을 기르는 뜻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후세에 그 누가 내 고심을 알아주랴.   

                                      <유회당집>에서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선생(1668~1734)은 권유(權惟)의 묘소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묘의 동쪽에 문중 원찰인 여경암과 거업재를 지었다. 유회당선생은 17세 되던 해(1684) 아버지 권유(權惟)가 세상을 떠나자 무수동(수철리)에 묘소를 마련하고 묘막을 지어 삼년상을 지냈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함평군수 등의 관직을 거치다가 40세가 되던 1707년 힘이 안 되어 미루었던 집 짓는 일을 가족을 이끌고 들어오면서 선친의 묘소를 현 위치로 이장하고 먼저 묏자리 아래 100보 되는 곳에 시신과 제기를 임시로 안치할 집을 지었는데, 때로는 시간이 늦으면 그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듬 해에 다시 묘막 서쪽에 두어 칸의 집을 지었다. 동쪽 방문을 열면 아침저녁으로 묘를 보면서 절을 할 수도 있었고, 비바람이 칠 때에도 제사를 지낼 수도 있었다. 문을 닫으면 쉬거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집을 유회당(有懷堂)이라고 했는데, 명나라 전묵제의 시 ‘명발불매(明發不寐) 유회이인(有懷二人)’에서 따온 것이다. 부모의 은혜를 끝내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유회당에 마련된 좌우에 마련된 방은 불기재(不欺齊)와 구시재(求是齊)라 하였다. ‘속이지 말고 옳은 것을 구하라’는 이 말은 증조부 만회 권득기의 유훈이다.

  그는 돌아가신 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이 집을 지었고, 선친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집 이름을 삼았으며, 조상의 가르침을 좌우에 붙여놓았다.

 

1715년 유회당 뒤편에 세운 삼근정사. 부모의 묘, 담 옆 시넷물, 산에 심은 꽃이 가깝다는 뜻이다.

  유회당 뒤편, 처음 묘소를 모시고 시묘살이를 하던 자리에 48세가 되던 1715년 삼근정사(三近精舍)를 세웠다. 부모의 묘가 가깝고, 담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가까우며, 산에 심은 꽃들이 가깝다는 뜻이다. 유회당 선생이 생전에 도화서 화공을 불러 그린 <무수동도無愁洞圖>를 살펴보면 시냇물에 돌다리 두 개가 놓여져 있다. 마루 오른쪽에 걸려있는 하거원(何去園)이라는 편액은 관직으로 떠나면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어버이의 묘소가 있는 이 곳(묘소 앞에 꽃과 나무로 만든 동산)을 차마 어찌 떠나랴!

  여경암은 무수동 권씨 문중의 원찰(願刹)이다. 묘소의 동편 언덕 너머에 있다. 부모의 묘소를 관리하며 부처님의 힘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여경암 뒤편에 산신각도 있으나 상량문의 내용으로 보아 여경암보다 후대인 188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경암은 당초 1710년에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5년 뒤에 자리를 옮겨 다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업재(居業齊)는 여경암 앞에 세워서 집안의 자제들과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공간이다. 현재에도 방학이면 공부하러 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줄기가 시원하기 그지 없으나 처음 건립할 당시에 있었다는 연못은 자취가 없고,  돌을 깎아 만든 수조와 확실한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석재가 남아 세월을 이어주고 있다.

  여경암을 나와 묘소 앞으로 난 길을 되돌아 나와 유회당을 뒤로 하고, 잠깐 발품을 팔면 은행나무 두 그루와 함께 초가지붕을 한 자그만 정자가 마중을 나온다. 무수동 권씨(유회당파)의 종가이다. 최근에 복원공사를 해서 정감이 덜하지만 유회당선생의 맏아들 권형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광영정은 지나는 누구나 잠시 쉬어가게 하는 정감을 지녔다.

  시냇물을 끌어들여 앙증맞은 폭포를 만들고 못 안에는 연꽃을 심어 마음을 가라앉히며 더운 여름철에는 족탁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사방으로 걸린 수월란, 인풍루, 관가헌,  광영정 등의 편액은 사방에서 보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종가 앞뜰에서 땀 흘리던 농부도 잠시 허리를 펴고 누울 수 있고 길을 지나던 여경암 스님도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해마다 이엉을 해 씌우는 수고를 마다하고 초가지붕을 고집하는 무수동 권씨의 미학적 안목도 돋보이지만 개인 소유의 정자에 담장이 없어 누구나 부담 없이 쉬어갈 수 있고,  방향만 돌아 앉으면 네 개의 정자가 되니 그 효용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동 권씨 문중의 원찰인 여경암.

  유회당은 1668년 7월 현재의 탄방동(당시에는 유성현)에서 태어나 10세 때에 외할아버지 송시열에게 학문을 배웠고, 21세 때에 할아버지인 권시의 제자이자 사위인 윤증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당시 이미 노론과 소론이 갈라진 상태에서 외할아버지의 학풍이 아닌 고모부(윤증)의 학풍을 따른 것은 할아버지가 말년에 효종임금의 상(喪) 때 ‘조대비의 복상’에 대한 견해에서 서인계(송시열·송준길)의 입장과는 달리 남인계(윤휴·허목)를 변호하는 고산 윤선도와 견해를 같이 하면서 서인과 소원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22세 때인 1689년 2월에 제주도로 유배되는 우암 송시열을 배웅하면서 강진 만덕사(현재 백련사)까지 따라가 5일간 머물며 마지막 강론을 들었는데, 그 사연이 <남정일기(南征日記)>에 실려 있다.

  우암 송시열은 그와 헤어지면서 ‘마음을 곧게 세우고, 일을 옳게 처리하라. 이것은 너의 증조부 만회(晩悔)선생의 학문이며, 너의 할아버지 탄옹(炭翁)이 대대로 지켜온 바리때(衣鉢)이니, 너는 힘써 행하라’고 하였다. 우암은 마지막으로 떠나는 길에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탄옹 권시를 인정하며, 권이진에게 조상의 학덕을 따르라고 권한 것이다. 이 해 10월에는 정읍으로 내려가 사약을 받은 외조부 송시열의 장례에 참석했다.

무수동 권씨(유회당파)의 종가에 있는 광영정.  지나는 누구나 잠시 쉬어가게 되는 하는 정감을 지닌 곳으로, 초가지붕으로 얹은 미학적 안목이 돋보인다.

 유회당은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40여 년간 대사간, 호조판서, 공조판서와 동래부사, 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며 안팎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노론과의 혼인관계와 소론과의 스승과 제자라는 인맥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본인 스스로 말하기를 ‘당론에 무관심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관료형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67세가 되던 1734년 무수동에 돌아와 세상을 마감한 유회당 선생은 평생을 증조부 권득기의 가르침인 ‘매사필구시(每事必求是) 무락제이의(無落第二義)’를 자경(自警)구로 삼았다. 그의 해석을 그대로 옮겨본다.

선조께서 ‘모든 일에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여 두 번째 의리에 떨어지지 말라’ 하셨는데 가히 그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는 ‘시(是)’가 아닌 것을 ‘시(是)’가 아니라는 이 뜻을 헤아려 스스로 경계하였다.

  어지러운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옳음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행정 관료이자, 부모에 대한 한없는 효심을 행동으로 보여준 유회당 권이진 선생.

  오늘 그가 대전지역 효행정신의 표상으로,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 안동권씨대전종친회
글쓴이 : 패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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